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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에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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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인간극장' 이 거의 맨 처음 만들어졌을 때였다. 2000년 7월 31일부터 8월 4일까지, <아직은 스물 세살, 역전은 있다> 라는 제목으로 현대 정수성의 사연이 방영된 적이 있었다. (링크) 비록 영상은 남아있지 않지만 대본만 보아도 대강의 방영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수성의 형 정수근은 모두가 알다시피 당시 두산의 슈퍼스타 중 한 명이었다. 특히 위에 언급한 방송이 방영되기 전 해인 1999년에는 129경기에 출전해 타율 .325 도루 57개를 기록하며 커리어하이를 달성하기도 했다. 반면 그에 비하면 동생 정수성의 기록은 너무도 초라하다. 프로 통산 722경기에 나서 258안타를 치며 타율 .241과 127도루를 기록했는데, 정수근 1544경기 - 1493안타 474도루 기록과 비교하면 실로 초라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둘이 기록한 타수는 1071타수와 5329타수로 거의 5배 차이가 난다.


정수성이 야구 인생에서 처음 주인공이 될 기회를 잡은 것은 2005년이었다. 나이 스물 여덟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주전이 된 것이다. 형 정수근은 스물 여덟에 이미 FA로 롯데와 40억 6천만짜리 계약을 성사시켰는데, 정수성의 연봉은 고작 4천만원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해 4월에는 야구를 그만두려다가 정진호 수석코치의 만류로 다시 짐을 풀고 경기에 나섰다. (기사 링크) 그럴 만도 한 것이 정수성은 4월 말까지 거의 제대로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다. 고작 4경기에 백업으로 출전해 병살타나 삼진, 플라이를 몇 번 기록한 것이 다였다. 그가 2005시즌 처음 선발 출장한 것은 4월 28일 롯데전. 9번 타자 중견수로 당당하게 나선 그는 희생번트 2개와 안타 1개를 기록했다. 다음 날은 한화와의 경기에서 8번 타자 중견수로 나와 안타 2개를 기록하고 첫 타점을 올렸다. 또 다음 날에는 2번 타자 중견수로 출장해 2루타 1개를 기록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정수성은 팀의 2번 타자로 나서며 118경기에서 .273 / .344 / .339 29도루를 기록했고, 커리어 처음으로 100안타를 쳤으며 공을 20개나 맞으며 출루하는 투혼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2006년부터 정수성은 다시 원래의 자리인 백업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팀이 바뀌고, 2008년과 2009년 나름 2년 동안 쏠쏠한 대수비/대주자 요원으로 활약했지만 2010년에는 간염으로, 2011년에는 햄스트링 부상으로 거의 뛰지 못했다.


절치부심, 이를 갈고 준비한 끝에 다시 기회는 왔다. 2012년 정수성은 1번 타자로 출장하며 4월 말부터 6월까지 맹활약을 펼쳤다. 수없이 많은 타구에 몸을 날리고 평범한 땅볼 타구를 쳐도 1루까지 최선을 다해 뛰어가는 허슬플레이는 정수성의 상징이었다.


120506 : 앤써니를 상대로 시즌 첫 홈런을 기록하는 정수성 (영상)

120510 :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투수 앞 내야안타 (영상)

120510 : 정수성 호수비 시리즈 1 (영상)

120515 : 2루수 실책을 틈타 2루까지 내달리는 정수성 (영상)

120518 : 정수성 호수비 시리즈 2 (영상)

120522 : 정수성 호수비 시리즈 3 (영상)

120523 : 정수성 호수비 시리즈 4 (영상)

120531 : 9회 솔로 쐐기포를 쏘아올리는 정수성 (영상)

120624 : 삼성전,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끝내기 안타 (영상)

120628 : 김선우를 상대로 3루타 - 이후 이택근의 희생번트로 선취점 (영상)

120913 : 부상에도 불구하고 대주자로 기용된 정수성 (영상)


6월부터 체력 방전으로 타율이 급전직하했고, 8월 전력에서 이탈하기까지 했지만 결국 9월 정수성은 1군으로 복귀하였다. 손목 부상을 안고 대주자로 뛰는 그의 모습은 팬들에게 많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시즌 최종 성적은 87경기 출장해 .217 / .328 / .310 19도루. 시즌 타율 2할 1푼 7리는 굉장히 보잘것없는 성적이었지만, 정수성을 보잘것없는 선수로 평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몸을 날리는 호수비와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상징되는 그의 투혼은 .217이라는 숫자로 결코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13년 정수성은 결국 은퇴를 선택했고, 2군 주루코치로서 새 출발을 시작했다.


통산 성적을 보면 정수성에게 결국 역전은 없었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이택근이나 강정호 같은 스타들은 매 시즌 밥먹듯이 쳤던 100안타도 그에게는 단 한 시즌 도달한 기록이었고, 127도루라는 숫자 역시 제법 많긴 하지만, 이제 풀타임 3년차인 서건창의 110도루와 비교하면 당당하게 내놓기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나 뭐 어떤가. 팬들은 정수성을 숫자가 아닌 투혼의 상징으로 기억할 것이고, 가끔 유재신의 엉성한 주루플레이나 문우람 내지는 이성열의 답답한 수비를 볼 때마다 정수성의 빈 자리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오늘 삼성과의 목동 홈경기에서 정수성의 은퇴식이 열린다. 그가 프로야구 선수로서 주인공이 될 마지막 자리다. 새롭게 시작할 정수성의 야구인생 2막이 시원한 역전 만루홈런처럼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기원해본다.

Posted by 김에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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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6일 월요일 LG 트윈스와 NC 다이노스의 시즌 마지막 대결. LG 선발로 나온 신정락은 2볼넷 9탈삼진의 훌륭한 투구를 보이며 노히트노런을 해내지... 못했다. 8회 1사 이호준을 상대하다 중지 손톱이 크게 들리면서 결국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  비록 중간에 멈췄지만 신정락의 투구는 훌륭했다. 타자들의 방망이는 투스트라이크 이후 신정락의 120km/h 커브에 춤을 추었고, 전광판 'H' 아래 찍힌 0이라는 숫자는 바뀔 줄을 몰랐다. 아쉬운 것은 NC 선발 테드 웨버도 7이닝 6안타 6K 무실점으로 호투하면서 승리조차 따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상)


신정락은 내려갔지만 후속 투수인 유원상과 신재웅이 합작해 8-9회를 잘 막았고, 결국 9회말 이진영의 끝내기 적시타로 (영상) 한국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팀 노히트노런이라는 대기록을 만들어냈다. 6월 24일 찰리 쉬렉에게 당했던, 프로야구 역사상 14년 만에 다시 만들어진 노히트노런을 되갚아 준 쾌거였다.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신정락은 '아쉽지 않다' 라고 말했다. 양상문 감독 역시 그랬다. 아마 반쯤은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한다. 정규시즌 노히트노런은 단 11번만이 나왔고, 현대 정명원이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한 것까지 치더라도 12번이다. 역사의 13번째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회였는데 하나도 아쉽지 않을 리가 있겠나. 투수 한 개인이 차지할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이 퍼펙트게임이라면, 그 다음이 바로 노히트노런이다. 투수 출신인 양상문 감독도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양 감독도 '속은 그렇지 않을 텐데... 고맙다' 라는 말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 표현한 것 아닐까.


LG는 이 경기를 이기며 포스트시즌 경쟁에서 계속 치고 나갈 수 있는 힘을 얻었고, 7일 경기에서 삼성을 상대로 대역전극을 벌이며 또 승리를 이어갔다. 초반 9위까지 내려갔던 팀이 이제 5할 승률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실로 무서운 저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쉽게도 신정락은 개인 노히트노런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할 기회를 놓쳤다. 하지만 야구팬들은 '사상 첫 번째 팀 합작 노히터' 를 얘기할 때, 그의 이름을 언제나 제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만 하면 '아쉽지 않다' 는 그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나. 2년 연속 가을야구를 향해 동료들과 함께 만든 승리와 그 날의 경기에 항상 첫 번째로 회자될 영광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언젠가, 신정락이 또 다시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자신의 이름을 새길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Posted by 김에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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