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게 된 계기

0. 서론

저는 야구를 잘 모릅니다. 평소에 제가 쓰는 글이나 트윗들을 본 사람들은 '새끼 자식 녀석 평소에는 온갖 잘난 척을 다 하더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아무튼 잘 모릅니다. (진심임) 한때는 야구를 잘 안다고 느낀 순간도 있긴 했지만,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야구의 세계는 참으로 크고 넓으며 심지어 내가 한 발짝 따라잡았다 싶으면 두 발짝 멀어지기까지 하는 광활한 우주와도 같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때로 저는 야구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공포를 마주합니다. 내가 쭉 좋아하던 스포츠가 내가 이해하지 못할 영역까지 확장되는 것이 무척이나 두렵습니다. (최근에 그런 공포를 느낀 주제는 SSW였는데, 중요한 얘기는 아니니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다가 위의 질문을 받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공포의 허들이 나와 다른 사람도 있을 수 있겠구나! 야구팬이라면 가끔 까먹기도 하는 사실입니다만 야구는 상당히 복잡한 스포츠입니다. 가령 축구를 예로 들면, 축구 규칙에서 처음 마주하는 장벽은 기껏해야 오프사이드 정도입니다. 하지만 야구 규칙에서는 그런 걸림돌이 수도 없이 나타납니다. 아무리 오래된 야구광이라도 인필드 플라이, 보크, 낫아웃 등을 익숙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마련한 시리즈, [야구참고서]입니다. (애인이 작명 아이디어를 제공했습니다) 잭 햄플의 2007년 저서 '야구 교과서(원제: Watching Baseball Smarter: A Professional Fan's Guide for Beginners, Semi-experts, and Deeply Serious Geeks)'는 15년 이상 지났지만 아직도 야구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참고할 만한 좋은 책 중 하나입니다. 교과서가 있으면 참고서도 있어야겠지요. 그런 참고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글을 준비했습니다. 꼭 봐야 하는 글은 아닙니다. 이미 야구에 대해 지식이 풍부하신 팬이라면 여러 오류를 발견하면서 웃으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야구를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한 팬이라면 틀림없이 야구를 더 알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목표는 생후 3개월 된 웰시 코기도 글을 보고 나면 '커브 커브, 포심 포심' 하고 짖을 수 있을 만큼 쉽게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읽으시는 분이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건 글을 쓴 제 책임이 100%입니다.

 

제 블로그 글은 대체로 '나무위키에 내 기억을 위탁할 수 없다'는 목적으로 쓴 것이라 평어체지만, 이 시리즈는 다른 사람이 보라고 쓰는 의도가 99%기 때문에 경어체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좀더 편한 투로 다가갔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약간이나마 있습니다.

 

 

1. 투수들은 어떤 공을 던지는가

프로야구 1군에서 뛰는 투수들은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구종을 '던질 줄은' 압니다. 하지만 '던질 수 있다'는 것이 곧 '잘 던진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마음먹은 곳으로 공이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고, 원하는 코스로 공이 가더라도 어떤 구종을 던지는지 상대 타자에게 간파당할 수도, 공의 무브먼트가 충분하지 않아 안타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투수의 가장 기본적인 레퍼토리는 패스트볼-슬라이더-체인지업-커브입니다. (물론 여기에 몇 가지 기출변형으로 다른 구종들이 더해지거나 제외되기도 합니다) 선발투수라면 대체로 패스트볼을 포함해서 세 가지 구종, 불펜투수라면 대체로 패스트볼 및 나머지 하나의 구종을 더해(보통 슬라이더가 많습니다) 두 가지 구종을 괜찮게 던진다면 1군에 정착할 수 있습니다.

 

포심 그립

 

2. 투수들은 언제 특정 구종을 던지는가

투수들이 언제 특정 구종을 던지는지 명확히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몇 가지 경향성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1) 초구는 대체로 패스트볼(포심 혹은 투심) 계열의 공을 던질 가능성이 높다.

(2) 카운트가 투수에게 유리하면(0볼 2스트라이크, 1볼 2스트라이크 등) 변화구를 던질 가능성이 높다.

(3) 반대로 카운트가 투수에게 불리하면(2볼 0스트라이크, 3볼 0스트라이크 등) 패스트볼을 던질 가능성이 높다.

(4) 파워가 없는 타자 상대로는 가운데-몸쪽으로 찍어누르는 패스트볼을 많이 던지고, 파워가 있는 타자 상대로는 몸쪽으로 깊게 파고드는 패스트볼과 바깥으로 달아나거나 떨어지는 변화구를 함께 던진다.

(5) 같은 손 타자에게는 슬라이더로 유인구를 던지고, 반대 손 타자에게는 체인지업으로 유인구를 던진다.

 

당연히 위에 열거한 항목들은 '상대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높다'지, '100% 그렇다'는 진술이 아닙니다. 가령 제구에 자신이 있는 투수라면 3볼에 몰려도 스트라이크존 바깥쪽에 걸치도록 공을 던지면서 스트라이크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파워가 있는 타자를 상대하거나 병살을 유도해야 할 경우에 투수가 초구부터 변화구를 던지면서 승부할 수도 있고요. 반대 손 타자에게도 슬라이더를 던질 수도 있습니다.

 

 

3. 중계방송을 보면서 구종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세 가지를 보면 됩니다. 구속, 움직임, 상황.

 

첫 번째는 구속입니다. 올해 KBO 투수들의 포심 평균 구속은 143.5km/h입니다. 이것보다 빠른 공이 변화구일 확률은 높지 않겠죠. 물론 아까 얘기했듯이 야구에서는 100%가 없습니다... 가끔 140km/h 중반대의 슬라이더를 던지는 생태계 파괴종들이 등장하는데, 그런 예외들까지 얘기하면 너무 복잡하니까 일단 넘어갑니다. 다른 변화구의 리그 평균 구속은 다음과 같습니다. 슬라이더 132.2km/h, 체인지업 128.9km/h, 커브 121.0km/h입니다.

 

KBO 투수들 몇 명의 구종별 구속을 모아놓은 자료입니다. (※후라도와 페디만 2itracking 기준, 나머지는 스탯티즈 기준입니다 / 페디가 던지는 '커터'는 실제로는 '스위퍼'입니다) 대체로 포심 구속에서 10~14km/h 차이가 나는 것이 슬라이더, 그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느린 것이 체인지업, 그보다도 확실히 느린 것이 커브라는 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두 번째는 움직임입니다.

포심/투심 - 우리가 중계방송을 보면서 '곧게 간다'고 인식하는 빠른 공은 대체로 포심 혹은 투심입니다. 같은 손 타자의 몸쪽으로 공이 휘는 '테일링' 무브먼트를 중계방송에서 확인할 수 있는 투수들도 있습니다.

슬라이더 - 투수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같은 손 타자 바깥쪽으로 달아나는 느낌이고, 종으로도 횡으로도 움직임이 큽니다.

커터 - 패스트볼 계열과 슬라이더의 중간 움직임을 보입니다. 같은 손 타자 바깥쪽으로 살짝 휘는 느낌입니다.

체인지업 - 같은 손 타자 몸쪽 혹은 반대 손 타자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커브 - 같은 손 타자 기준으로 바깥쪽으로 떨어지지만, 슬라이더와 비교하면 대체로 종적 움직임이 더 큽니다.

스플리터 - 수직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반대 손 타자의 바깥쪽으로 휘어져나가는 움직임 또한 동반됩니다.

 

구종별 움직임은 다음 게시물에서 구종별 설명과 함께 첨부된 움짤에서 더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단락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세 구종만 구별해보는 연습을 해보겠습니다.

출처: 트위터 @PitchingNinja 2022년 8월 19일 트윗
출처: 트위터 @PitchingNinja 2022년 9월 8일 트윗

움짤의 주인공은 제이콥 디그롬(Jacob deGrom)입니다. 첫 짤에서는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그 다음 짤에서는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던지고 있습니다. 짤마다 두 구종을 구별하실 수 있으시겠죠?

 

세 번째는 상황입니다. 위에 말한 '투수들은 언제 특정 구종을 던지는가'를 다시 떠올려봅시다. 지금 맞서고 있는 타자는 중심타선에 있는 파워히터인가요, 아니면 별볼일 없는 9번 타자인가요? 좌타자인가요, 우타자인가요? 주자가 루상에 있나요? 포수는 블로킹에 능숙한 편인가요? 이렇게 현재의 상황들을 종합해서 인지하고 있다면 현재 마운드에 있는 투수가 어떤 구종을 던질지 대략은 감을 잡을 수 있고, 또 실제로 공을 던졌을 때 무슨 구종인지 얼른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추가하자면 투수가 어떤 공을 던지는 선수인지 미리 알아두는 것도 중요하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SSG의 서진용이라면 패스트볼(61.9%) 아니면 스플리터(37.3%) 두 구종 외에는 거의 던지지 않습니다. KT 주권 역시 세 번째 구종을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주력 두 구종이 차지하는 비율이 큰 투수입니다. (2022년 기준 패스트볼 34.1% 체인지업 58.7%) 이런 투수들은 구종을 구별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4가지 구종을 20% 이상 비율로 구사하는 삼성 수아레즈나, 5가지 구종을 모두 일정 비율 이상으로 던지는 LG 켈리 혹은 키움 후라도라면 한번에 무슨 공을 던지는지 화면으로 파악하기는 힘듭니다.

 

구종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아직 감이 오지 않는다면 베이스볼 서번트(Baseball Savant)의 미니게임 'Guess the Pitch Type'을 추천합니다. (링크) 투수들이 던지는 공의 비디오를 돌려보면서 이 투수가 방금 던진 구종이 어떤 것인지 골라보는 게임입니다. (포심, 싱커, 커터, 스플릿 핑거 패스트볼, 체인지업, 슬라이더, 커브 총 7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위에 말한 요소들을 바탕으로 연습해본다면 금방 익숙해지실 겁니다.

 

(다음 편에 계속...)

Posted by 김에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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