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수가 제일 잘하는 선수였는가? 라는 질문을 흔히 보곤 한다. 인터넷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질문이고, 술자리 같은 데서도 흔히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팬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선수가 누가 있는가? 라는 질문은 의외로 보지 못한 것 같다. 한번쯤은 나올 수 있는 질문일 터인데.
수많은 선수들의 이름을 떠올려본다. 히어로즈 팬이니까 전준호-송지만이 우선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최근으로 범위를 넓혀보자면 장성호, 박재홍, 조성환, 박경완... 수많은 스타들이 생각난다. 한 명 한 명 모두 훌륭한 커리어를 가진, 그리고 팀의 주축이었던 선수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LG 이병규만큼의 존재감을 가졌던 선수를 찾기 힘들다. 위에 언급한 선수들이나, 또는 언급되지 않은 수많은 선수들이 이병규보다 못하다 혹은 인기가 덜했다 그런 얘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단지 'LG의 이병규' 라는 여섯 글자만으로 연상되는 독보적인 느낌이 있다는 이야기다.
앞으로 이 정도의 응원을 잠실구장에서 들을 일이 있겠는가. 아니면 혹은 인천, 대전, 광주, 사직에선 어떨까. 근시일 내에는 없을 것 같다. 범위를 10년, 20년으로 넓혀보아도 쉽게 긍정의 답을 하기 힘들다. 이병규란 이름 석 자가 갖는 무게감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통산 1741경기 출전, .311 / .365 / .452, 7247타석에서 2043안타(통산 7위), 371 2루타, 161홈런-147도루, 972타점에 992득점. 누적스탯으로만 봐도 충분히 훌륭한 성적이다. 하지만 그의 대단함을 말하는 이유가 누적스탯뿐만은 아니다. 최고령 타격왕과 사이클링 히트 기록을 갖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마흔까지 리그 최고의 선수들과 경쟁할 수 있는 기량이 있었으며, '설렁설렁 한다' 는 이미지와 다르게 가장 먼저 전력분석미팅에 나타나 상대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성실함이 있었다. 그리고 팬들이 원하는 때, 얼마 주어지지 않은 기회에도 자신이 이병규임을 증명할 수 있는 선수였다.
이병규가 오늘 은퇴식으로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은 가운데 (사실 선수생활은 작년에 끝났지만) 같은 날 그라운드에 돌아온 선수가 있다. 그의 통산 성적은 이병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통산 96경기 출장, 383.1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4.34. 통산 WAR 7.83은 1999년 이병규의 한 시즌 그것에도 미치지 못한다. 프로 13년차 선수지만 규정이닝을 채운 것은 단 한번. 그러나 그 이름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조정훈이기 때문이다.
2008년 5선발로 14경기에서 5승 3패 3.15로 무난한 성적을 찍은 조정훈은, 이듬해인 2009년 화려하게 날아올랐다. 27경기 14승 9패 4.05, 182.1이닝에서 175탈삼진. 14승은 윤성환-로페즈와 함께 공동 1위의 기록이었고, 175K 역시 류현진에 이은 2위 기록으로 리그 수위급 투수라 하기 부족함이 없는 성적이었다.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도 두산을 상대로 8이닝 7K 2실점으로 승리를 따내며 9년 만의 준PO 승리에 공헌하기도 했다. 불과 나이 스물다섯. 거인의 뉴에이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고, 많은 이들이 다음 시즌의 순항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길고 어두운, 끝도 없는 바닥의 시작일 줄 어찌 알았으랴. 가을부터 어깨 염증에 시달린 조정훈은 2010시즌 부진에 시달렸고 결국 6월 30일 등판을 끝으로 시즌을 접어야 했다. 8월 팔꿈치 인대 접합수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토미존 서저리' 를 받고 11~12시즌 재활에 매진했으나 2013년에도 조정훈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2013년 두 번째 수술을 받고 2015년 시범경기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다시 팔꿈치 이상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2016년 1월 세 번째 수술, 그리고 1년의 기다림. 올 시즌 드디어 퓨처스리그에 등판한 조정훈은 18경기에서 3.3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실전에서 투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였고, 7일 등록되어 9일(오늘) SK와의 경기에서 복귀했다. 2583일 만이었다.
8회초 6:0으로 뒤진 상황에서 등판한 조정훈은 김성현과 이성우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웠고, 노수광을 1루수 실책으로 출루시키긴 했으나 바로 다음 타자 나주환을 땅볼로 잡아냈다. 빠른 공 구속은 143km까지 나왔으며, 김성현-이성우에게 던진 결정구는 전성기 때 그의 위닝샷이었던 포크볼이었다. 놀랍게도 그 위력은 여전했다.
8년의 시간이 흘렀고, 스물 다섯 에이스는 어느새 서른 셋의 중고참이 되었다. 이제는 선발투수 조정훈을 보기 어렵겠지만, 7년 간의 긴 재활을 견디고 마운드에 선 그가 너무나 자랑스럽기만 하다. LG의 이병규-롯데의 조정훈, 서로 큰 연관은 없는 선수들이지만, 누군가의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건 공통점이다. 한 명은 전성기 때에도 불혹의 나이에도 LG의 가을야구를 이끌었고, 한 명은 혜성처럼 나타나 롯데의 가을야구 선봉장으로 자리매김했었다. 이제 이병규는 떠났지만, 그가 받은 수많은 팬들의 성원이 돌아온 조정훈의 1구 1구에 향하길 기원한다.
-동영상이 이 페이지에서는 다 나오지 않네요. 유튜브에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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